<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은 자신의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피플안전(안전뉴스가 펴내는 인물월간지)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정리해 아이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최근 <나는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내가 겪은 변화와 경험을 부모님들과 나누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 책은 거창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전성은 선생(4대, 6대 교장)과의 공동 작업물이다. 선생과의 인연은 몇 년 전, 모 주간지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비롯되었다. 방송국 리포터로 오래 일하다가 아이 교육 문제로 잠시 본업을 놓은 후 교육신문 기자로 일을 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거창고의 진가를 알지 못했고, 사교육 도움 없이 공부 잘하는 비결이나 캐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한결같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의무밖에 없다느니,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느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답변을 내놓으시는 거다. 동문서답이 따로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가닿지를 못했던 것이다. 인터뷰는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기사도 간신히 정리해서 마감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 한편에 선생의 말들이 묵직하게 맴돌았다. 쉽게 수긍하지 못했지만 막연한 끌림이 있었다. 입에 쓴 약 같은 그 이야기가 바로 직업선택의 십계였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도입부에 실려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삶의 원칙으로, 요즘에는 각종 진로교육 강연 등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유명해진 직업선택의 십계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구절 하나 마음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말들만 모아놓았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가혹하다. 내 욕심 차리고 싶은 본능을 자꾸만 내려놓게 만드는 문장들이어서 기억에서 영영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다. 만약 내가 십 년 전에 봤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노력만 하면 뜻대로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으니까. 지금은 세상이, 특히 자식이 내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하면서 새털만큼의 분별력이 생겼지만. 거창고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 건 90년대 중반부터다.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한국을 대표할 만한 학교’로 거창고를 꼽은 일화가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그 후로는 ‘서울 유명 학교들보다 대학 진학률이 더 높은 학교’라거나 ‘작지만 강한 학교’등의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최근에도 입시가 다가오면 지방 명문고라는 타이틀로 기사에 오르내리곤 한다. 하지만 거창고를 단지 성적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학교에는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성’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그것, 참 사람됨의 교육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교육에서 인성과 성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둘은 하나를 잡으면 하나가 밀려나는 참 묘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둘 다 잡으려다가 어느 순간 벽에 턱 부딪치는 상황을 부모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하고 스스로 앞날을 개척해가면 좋으련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공부를 한다고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밖에 모르는 걸까.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어째서 뉴스 한 줄을 읽지 않는 걸까. 엄마인 나부터 인성보다 공부를 우선시했던 결과인 것 같다. 공부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성교육에는 여유를 부렸던 걸까. 지금에 와서 보니, 인성을 놓아버린 사이 인성만 놓친 게 아니라 공부도 잡히지 않더라는 것만 확인했다. 이제야 마음이 급해져서 억지로 인성을 가르치려 하면 교육이 아니라 숫제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머릿속에 거창고가 떠올랐다. ‘그래 거창고가 있었어. 성적도 지켜내고 인성도 포기하지 않는 학교가 있었지.’ 거창고 강단에 들어서면 빛바랜 듯 촌스러운 액자에 담긴 직업선택의 십계를 볼 수 있다. 꽤 빈번하게 이 액자가 바닥에 팽개쳐지고 부서지는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볼 때마다 부담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직업선택의 십계를 누군가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 역시 직업선택의 십계라고 졸업생들은 말한다. 진로를 결정할 때 사회생활하면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직업선택의 십계는 양심의 몫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공부하듯 배운 게 아니라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스며드는 교육이어서 쉽게 잊지 못했다. 몇 마디 말로 직업선택의 십계를 설명하려 든다면,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내라는 막연한 뜻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반문을 부르고 “그래야 세상이 살기 좋아지니까”라는 아주 빤한 대답 뒤엔 “그래? 그럼 너희나 그렇게 해. 나는 그렇게 안 할래”로 이어지는 단순한 논리밖에 안 된다. 나는 직업선택의 십계를 선택할 때 자신에게 던지는 10가지 질문이라 부르고 싶다. 도달하기 어렵지만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자꾸 말을 걸어오는 질문 말이다.
착한 명문대생이 교육의 목표일까?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세요?” 누군가 내게 물었다. “음....”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다. 왜 대답을 못 했던 걸까? 오랫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여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면서 왜 바로 대답을 못 했던 걸까. 내가 욕심 많은 엄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를 꼭 S대에 보내겠다거나 아이 중에 하나는 의사로 만들고 말겠다는 욕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아이들이 떵떵거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고 소박하게, 자기 일을 갖고 사회에 기여하며, 남에게도 베풀면서 보람을 느끼고, 나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 정도 나는 직업십계명이란 말을 전성은 선생과 인터뷰하던 날에 처음 들었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부모나 배우자가 반대하는 곳으로 가면 틀림없다 등등. 들으면서 속으로는 다소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용이야 좋긴 한데, 그렇다고 굳이 고생문이 훤히 열리는 길을 찾아갈 필요까진 있을까. 그저 너무 이기적으로 살지 말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어법을 사용했으려니 미루어 짐작하면서, 내 마음대로 그 의미를 중화시켰다. 그리고는 곧 잊어버렸다. 한참을 직업십계명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도 않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엉뚱한 곳에서 다시 마주쳤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책을 통해서였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해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안함 ,그것도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는 물입니다.”-신영복,<나무야 나무야>중에서 나 역시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경쟁 시스템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넘어지고 얻어터지고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반문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힘들어도 참으면서 이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여태껏 내가 믿어왔던 게 혹시 허상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치고 쓰러지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구조 속에서 갇혀 내 아이들이 희생양이 되는 건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동안 외면했던 문제의식들을 더 묻어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겼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아 자꾸만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내 인생에도 나를 이끌어줄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지만,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 끝까지 몰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점, 그것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20대와 30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싫어 굳이 외면한 채 청년기를 보냈다는 모종의 부채의식. 나는 그런 부담을 갖고 있었다. 고민을 생략한 덕분에 몸은 편했는지 모르지만 외면한 순간부터 성장을 멈춘 어른이 되었다. 그걸 이제야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길 바라세요?”라는 질문에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솔직한 대답은 이렇다.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는 안 컸으면 좋겠다. 돈만 많은 사람은 안 되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만 혼자 행복한 거 말고 모두가 함께 어울려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마음의 예방주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선택과 마주할 때 남들이 좋다고 유혹하는 편한 길이 아닌 조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내 마음에 흡족한 길을 선택하라는 지침이 있다면 참 좋겠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2014년 겨울, 일본에서는 우경화 바람을 타고 일본 최초로 국산 전투기를 만들어 낸 과학자가 존경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호리코시 지로, 그를 다룬 영화<영원의 제로>가 관객 동원 1위 자리를 지켰다. 일본 전투기와 전쟁의 피해자인 한국인으로서는 전혀 이해하기 힘든 일 아닌가. 호리코시는 자신이 만든 전투기가 전쟁에 사용되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 애니메이션 명장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작품 <바람이 분다>에서 호리코시 지로를 시대에 휩쓸려간 불행한 과학자로 묘사했다. 단시 시대 탓일까? 동시대를 산 독일의 비행기 후고 융커스는 나치에 반대했다. 그와 비교한다면, 호리코시 지로는 국가에 순응한 현실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그를 존경받을 만한 과학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 사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컴퓨터를 발전시킨 두 명의 미국인 과학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존 폰 노이만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미국이 소련보다 하루라도 빨리 폭격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노버트 위너는 당시의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다고 판단했다. 누가 더 바람직한 인생일까? 유행은 순간이다. 직업십계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일 거라는 기대를 한다. 물론 삶과 일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므로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직업십계명은 무슨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한지 알려주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다. 만약 내 삶에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직업십계명을 모르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괜히 알고도 지키지 못하면 마음만 심란해질 테니까. 하지만 나 역시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직업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이를테면 거창고는 진로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지, 직업십계명을 가르치는 학교인데 뭔가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얼마 전 딸아이 학교에 간 적이 있다. 중학생인데 교실 뒤편 게시판에 커다랗게 20년 후 유망직종 베스트 10이라는 글이 커다랗게 인쇄되어 걸려 있었다. 어느 학교를 가보든 진로교육에 대해 굉장히 열심이다.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인 시대라 요즘은 누가 어느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것보다 어느 유명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에 더 많이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그런데 직업의 인기 순위가 굉장히 빠른 주기로 달라지고 있어서 지금 좋다는 일자리를 얻어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내 지인 중에도 대학을 두 번 다닌 사람이 있다.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십 수 년 전 불어 닥친 한의대 광풍에 휩쓸려 다시 한의대에 들어갔다. 한의대에 다시 들어갈 때는 언제 그만두어야할지 모르는 대기업보다는 안정된 평생직장을 찾는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막상 한의사가 되고 보니 이 직업도 그리 안정된 평생직장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 학교에서 본 ‘20년 후 유망직종 베스트 10’으로 돌아가 보자. 1위로 거론된 직업이 경영지도 및 진단 전문가, 2위가 소음·진동 환경 기술자였다. 뒤이어 에너지 시험원, 에너지 공학 기술자, 에너지 공학 연구원 등이었다. 하지만 과연 예견대로 20년 후 그 직종이 유망할지는 의문이다. 만약 이런 정보에 의지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진학과 진로를 결정하는데 세상이 바뀌어버린다면 그땐 정말 억울하지 않을까? 내 아이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되는 진로교육은 어떤 것일까? 내가 모델로 삼기로 한 거창고의 진로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러나 전성은 선생의 대답은 이번에도 싱겁기 그지없었다. “노, 프로그램” 설마 직업십계명을 만든 학교인데 진로교육 프로그램이 없을 리가... 전성은 선생의 대답인즉슨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망직업 배스트나 형식적인 직업 강의 프로그램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진로선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재능과 소질에 관심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보다는 ‘관심’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자꾸 권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진로교육이라고 했다. 전성은 선생은 설령 그것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없을지라도 재능과 소질과 관심이 가는 일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 고통과 역경에 처하게 될지라도 오히려 더 큰 삶의 가치에 눈뜨는 계기를 만날 수 있다. 안정되고 성공하기만 하는 삶 속에서는 절대로 참 행복의 가치를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생, 네가 사는 건”맞지만, 그렇게 살게 되는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아플지, 내 아이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부모 마음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아이들에게 결정을 맞기면, 시간은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돌고 돌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선택이라는 것. 아무리 힘들고 돈을 못 벌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면 감당할 기운이 생기는 법이니까. 부모는 핼퍼가 되어줘야 한다. 리더가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성공한 만화가는 아이들이 찾아와서 그 직업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긍정적인 답을 해주지 않는다. 착상이나 취재, 그림 그리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지 불평불만을 한가득 늘어놓아본다. 그렇게 답하면 아이들은 금세 나뉜단다. 어렵다고 해도 끝내 하겠다고 알려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은 진짜 일을 낼 아이들이다. 그는 그런 아이들에게는 만화가의 일에 대해서 아낌없이 설명해준다고 한다.
진로 찾기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란? 소질과 재능과 관심이 무엇인지 알려면 경험을 해봐야 한다. 우리 교육 실정을 비춰보면 중·고등학교만 가도 성적의 비중이 워낙 높아져 경험은 공부보다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경험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는 것도 초등학교 때까지다. 그런데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면 많은 학부모가 단순히 여행이나 각종 체험활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관심을 찾기 위한 다양한 경험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체득하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다.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관심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거창고와 한줄기에서 뻗어 나온 샛별초등학교(1964년 전영창 선생이 설립)는 미술, 음악, 글쓰기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램을 준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하나씩은 참여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도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알게 된다. 비슷한 프로그램에로 거창고에는 예술제와 운동회가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거창고에만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예체능 활동이 없는 학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차이점은 참여하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사생대회, 음악제, 백일장 대회가 아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참여하며 어떤 종목에 참가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축제이자 운동회라는 점이 다르다. 잘하는 아이들만 뽑아서 하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수준만 놓고 보면 거창고의 운동회와 예술제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농구, 축구, 배구, 사진, 그림 등 서른여섯 종목이나 되는 예술제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참여한다. 그것을 정하는 건 전적으로 학생들의 몫이다. 교사는 개입하지 않는다. 대개 농구를 잘하는 아이가 축구도 잘하고 배구도 잘하는 경우가 많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난 한 사람이 여러 종목을 독식하는 법이 없다. 못하더라도 골고루 어떤 종목이든 꼭 참여하도록 정해놓았다.
잘하는 학생이든 못하는 학생이든 누구나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여한다. 이런 활동이 주는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보통은 단체 활동을 통해 협동심을 배우게 된다고 하는데, 직접 진행하고 집행하고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해결하고 심판도 보면서 얻게 되는 교육적 효과는 단지 협동심에 그치지 않는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보니, 거창고의 운동회나 예술제는 행사를 위한 문화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무엇을 위해서, 혹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들끼리 스스로 한다는 사실을 핵심에 두었다. 학생들이 전 과정을 알아서 하도록 허용하는 자신감, 학교가 학생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거창고의 운동회와 예술제는 학교의 모든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었으며 거창고의 문화가 되었다. 부모 조종형 아이일수록 진로 찾기가 늦다 몇 달 전에 있었던 큰애 합창대회 때의 일이 떠오른다. 큰애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매년 정기적으로 합창대회와 백일장, 운동회가 열린다. 합창대회나 운동회 날짜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한 달여 전부터 연습을 시작한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지휘자와 반주자를 뽑고 각 부분별로 연습을 한다. 아침에 30분씩 일찍 모여 연습을 약속해놓고도 절반도 채 안 나온다는 거다. 주로 학원을 가야한다거나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공부할 게 밀렸으니 우리 반이 노래를 잘 부르거나 말거나 입맛 뻥긋하고 말겠다는 아이가 수두룩하다. 알고 보면 아이들 생각이라기보다는 엄마들 생각이다. 그런 엄마의 생각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연습에 빠지고 학원으로 가게 된다. 다수의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어차피 매년 형식적으로 여는 합창대회에 뭐하러 그렇게 에너지를 쏟느냐고 아이를 타박했다. 대충 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요령껏 빠지게 하고, 나중에 중요 스펙으로 기재할 수 있는 교내 수학경시대회나 과학토론 같은 행사에는 억지로라도 참여하게 했다. 한번은 아이가 운동회에서 치어리더를 맡아 댄스 배틀에 나가게 된 적이 있는데, 다들 공부하느라 약삭빠르게 피하는 일을 어쩌자고 어리석게 맡았느냐고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런 엄마였다. 그래놓고 애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직 좋아하는 게 뭔지 찾지 못했다고 걱정만 늘어놓았다. 좋아하는 게 뭔지 아직 못 찾은 게 아니라,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를 외면했던 거다. 분명한 말로 의대에 가라고 강요하거나 유도한 적은 없지만, 아이가 스스로 의대 같은 엘리트 코스를 가고 싶다고 말하기를 바랐던 거다. 아이가 알아서 부모의 뜻에 수긍해주기만을 기다렸던 거다. 강요하는 엄마가 아니라면서, 욕심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욕심 많고 강요하는 엄마보다 실은 더 무서운 엄마였다. 정말로 내 아이가 행복한 직업선택을 하기를 원한다면, 값비싼 진로적성 검사나 해외체류 경험보다도 학교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에서 마음껏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게 어떨까. 부모가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게 가장 효과적인 진로교육일지도 모른다. |
